포크볼의 NPB와 투심의 MLB

므르브와 느프브간의 레벨차이에 대한 견해를 크게 두가지로 대별해보면 느프브는 메이저리그의 트리플A급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의견, 그리고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의 중간정도의 수준이라는 의견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느프브의 실력은 트리플A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의견은 다소 무리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일본투수들이 던지는 포크볼에 매우 약하다라는 점 때문이다.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마이너리그의 평균적인 투수가 던지는 전구종의 질은 당연히 메이저리그의 평균적인 투수들에 비해 떨어진다.

 

그러나 느프브와 므르브간에는 이런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포크볼에 대한 타자들의 대처능력은 일본타자들이 압도적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보다 높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리그 기록으로 보여준 선수가 쿠로다투수다.

쿠로다 히로키는 메이저리그에서의 마지막 시즌 3.4WAR를 기록한 리그 굴지의 투수였다.

이렇게 쿠로다 투수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게 해준 구종은 바로 포크볼이었다. 그의 PITCH VALUE는 무려 12,8이었다.

 

마에타 켄타 투수가 메이저리그 진출 직전해의 WAR7.0이었고 작년 메이저리그에서의 WAR3.5였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쿠로다 히로키 투수는 일본에 복귀해서 마에다 수준의 WAR는 찍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었다. 일본에 진출한 메이저리거로서 보기 힘든 대물이 바로 쿠로다였고 그는 응당 느프브 최고의 투수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물론 쿠로다 히데키는 느프브에서도 매우 훌륭한 투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에다나 스가노급의 투수는 아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극명하다. 일본타자들의 포크볼에 대한 대응력은 메이저리그 타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한번 쿠로다 히로키가 느프브 복귀 첫해에 기록한 포크볼의 PITCH VALUE를 살펴볼까?

고작 3.9였다. 메이저리그에서 12.8을 기록했던 포크볼의 PITCH VALUE가 이렇게 급전직하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쿠로다가 마에다나 스가노급의 성적을 찍을 수 있었겠는가? 메이저리그에서와 다를바없는 WAR밖에 기록하지 못한 것은 느프브타자들이 므르브타자들에 비해 포크볼 공략에 있어서 훨씬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일어난 당연한 귀결이었다.

 

필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므르브와 느프브의 레벨 차이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이 있다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어서다.

느프브는 전체적으로 므르브의 레벨 다운이라고 보면 되는 마이너리그와 다르다라는 점이다.

 

느프브는 여러모로 므르브와 다른 특성을 가진 독립된 리그고 부분적으로는 므르브에 뒤지지만 부분적으로는 므르브를 능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부분이 포크볼에 대한 타자들의 대응력이다.

 

다시한번 쿠로다 히로키투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쿠로다 히로키가 거액의 오퍼를 뿌리치고 히로시마 카프로 복귀한다라고 했을 때, 그의 용기와 의리에 대한 칭찬이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했는데, 또 하나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메이저리그에서 갈고 닦은 쿠로다의 투심패스트볼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완전히 투구스타일을 바꾼 쿠로다는 일본복귀 시점에서는 완전히 투심패스트볼 투수로 변모해있었다. 포심처럼 날아오다가 볼존으로 흘러나가거나 볼존에서 스트라이크존으로 파고드는 투심은 마구로 형용되기도 했다.

 

과연 일본의 타자들은 쿠로다의 투심을 제대로 공략할 수 있을까란 주제는 상당히 흥미있는 화제거리였고 히로시마를 상대해야하는 센트럴리그 구단들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쿠로다의 투심에 대한 공략법은 크게 두가지가 제시되었다.

첫째는 치기힘든 투심을 최대한 치지않는 방법이었다. 즉 스트라이크존을 좁혀서 홈플레이트 부근이나 무릎쪽으로 들어오는 코스의 공은 최대한 치지않고 기다리는 타격의 인내심을 중요시한 어프로치였다.

 

둘째는 좀더 타격의 적극성을 중시한 어프로치로 히팅포인트를 뒤에두고 철저하게 역방향으로 밀어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타자들의 특성상 첫째보다는 둘째가 더 선호될 수 밖에 없다. 느프브타자들의 특징중의 하나가 므르브타자들에 비해 컨택에서 뛰어나다라는 것인데 칠 수 있을 것 같은 속구를 치지않고 기다린다라는 것은 대단히 힘들게 여겨질 것이다.

무빙패스트볼의 유혹에 걸려들기 쉬운 조건이다.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일본 타자들이나 WBC에서의 일본팀 타자들도 대개 두 번째의 어프로치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번 미국과의 준결승전에 임한 일본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후 코쿠보감독의 인터뷰를 들어보니 히팅포인트를 늦추고 역방향으로 밀어치라고 지시했는데 실제 므르브 투수들이 던지는 투심의 스피드와 변화가 엄청나서 놀랐다라는 말을 던졌다.

 

여담이지만 코쿠보감독은 메이저리그의 투수들이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경기전 인터뷰에서의 코쿠보의 일본전 선발투수 로악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했을 때에도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코쿠보는 로악이 대단한 볼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느낌을 이야기했는데 이 발언은 철저히 일본적 야구관에서 이뤄진 발언다. 로악의 볼스피드는 대개가 140KM대 후반이고 팔을 몸에 최대한 붙혀서 릴리스 포인트를 감추는, 그래서 체감속도를 극대화하는 아름다운 투구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정도의 볼이라면 능히 칠 수 있다. 로악이 투심을 던진다라고 하지만 역방향으로 밀어치는 정도의 대응으로도 충분하다.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더욱이 로악은 정상급 투수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할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도 없고 속구로만 윽박지르는 투수로밖에 안보였을 것이다. 일본적인 관점에서라면 말이다.

 

실제로 미국과 붙어보고 2-1로 패하고 난 후에야 코쿠보는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던지는 투심의 스피드와 변화에 놀랐다라고 이야기했다. 그걸 이제 와서 느꼈다니 할말이 없다.

 

의식적으로 역방향으로 밀어친다라는 발상은 150KM전후의 스피드로 날아오는 투심패스트볼에 대해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렇게 했다간 뱃타이밍이 늦어 공에 뱃이 밀려버리고 말뿐이다.

믈론 그렇게 스윙을 해서 공을 뱃에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나 단지 내야땅볼이나 평범한 플라이를 양산해낼 뿐이다.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얌전히 그대로 따라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날 경기에서 일본팀 타자들중 제대로 자신의 스윙이 가능했던 타자는 키쿠치 료오스케였고 98마일의 바깥쪽 높은쪽에 들어오는 치기힘든 코스의 투심을 통타해 동점홈런을 만들어냈다. 키쿠치는 지난 시즌 느프브에서 투심에 대한 대응력이 두 번째로 좋은 타자였다. 그의 투심에 대한 PITCH VALUE9.9. 왜 그가 이렇게 투심에 대한 대응력이 좋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투심의 궤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눈을 가지고 자기 스윙을 하지않으면 근본적으로 고속무빙패스트볼을 공략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일본타자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투심패스트볼을 주축으로 하는 쿠로다 히로키의 일본복귀는 일본야구계를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럼 과연 느프브타자들은 쿠로다의 투심에 대해서 어떤 대응을 보였을까? 결과는 기대밖으로 일본타자들의 예기치 않은 선전이었다. 쿠로다는 고작 0.2PITCH VALUE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이는 느프브의 평균적인 투수에 비해 0.2점 정도 덜 실점했다라는 것인데 특별히 무기가 될만한 구종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느프브에서 투심을 던지는 투수는 대개가 외국인 투수들이고 이들은 주로 트리플A에서 활동했다. 그렇다면 마구로 불리우던 쿠로다의 투심도 고작 마이너리그 수준의 투심이었다라는 것인가?

 

코쿠보감독이 미국팀 투수들이 던지는 투심이 예상외로 위력적이었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쿠로다의 투심을 마구로 인식하고 있었던 일본야구계의 우물안 개구리격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무지의 연장선에 있는 느낌이다.

 

필자는 느프브야말로 직구와 같은 궤도로 오다가 종으로 급격하게 떨어지는 종의 변화구(포크볼, 체인지업)에 기가막히게 잘 대응하는 스페셜리스트들의 리그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부분으로 본다면 느프브는 세계 최고의 리그다.

 

반면 므르브는 고속투심패스트볼 공략의 달인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메이저리그가 세계최고다.

포크볼의 리그와 투심의 리그라고 불러도 좋을까?

 

노모 히데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포크볼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우에하라라는 포크볼의 장인이 출현하여 지금도 정상급 구원투수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다.

 

히로시마에 복귀해 결국 자신의 친정팀 리그우승을 일궈내고 은퇴한 쿠로다 히로키의 최대공적은 투심패스트볼에 대한 관심도를 본격적으로 끌어올렸다라는 점이다. 이제 쿠로다는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이고 그의 플레이를 지켜본 일본투수들도 지금까지의 포심일변도에서 서서히 탈피되어 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히 일본타자들의 투심에 대한 대응력도 좋아질 것이다.

 

느프브와 므르브는 서로의 강점과 단점이 분명한 리그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양리그의 교류는 더 확대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반적인 세계야구의 질을 올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일본전을 앞둔 미국의 불안감

이번 대회 일본팀은 아오키 노리치카를 제외하면 모두 npb선수들로 채워져있다. 대회전부터 지적되던 약점이었다. 특히 투수전에서 스몰볼로 두세점을 쥐어짜는데 능한 것이 일본팀이고 보면 아오키와 npb선수들로 구성된 팀편성은 일본팀의 승리패턴인 스몰볼 야구의 구현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만도 하다. 그래서 일본내에서도 이번 대회에 크게 기대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많았다.

생각해보라. 타나카 마사히로, 다르비슈 유, 마에타 켄타가 없는 일본의 마운드를.. 게다가 믿고있던 npb의 괴물투수 오오타니마저 부상으로 사퇴했다.

이런 마운드의 사정으로는 일본팀의 무기인 스몰볼야구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가 없다. 스몰볼이 유용한 경기흐름은 서로가 적은 득점의 경기를 하면서 한두점의 가치가 중요해질 때다. 따라서 강력한 투수력은 매우 중요한 생명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에는 스가노라는 좋은 선발투수가 있다. Npb투수들은 야수와는 달리 메이저리그에서도 평가가좋다. War라는 지표에서는 수치에 따라 선수의 등급을 나눠놓고 있는데 적어도 일본에서 슈퍼스타급의 war를 기록했다면 확실하게 메이저리그에서도 호선수급의 war는 찍어준다.

스가노도 마찬가지다. 지난 시즌 6.6의 war를 기록한 스가노는 마에다급의 선발투수라고 보면된다. 따라서 스가노가 난조만 보이지않고 평상시와 같은 피칭만 해줘도 일본이 장점으로 하는 스몰볼 우위의 경기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상황이 된다면 미국이 대단히 불리해진다.

이렇게 볼때 스가노의 존재는 미국에게 있어서 매우 위험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팀의 선발투수진이 야수진에 비해 불안한 점과 일본팀의 경우 야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주춤해지면서 좋은 타자들의 대회참가가 역설적으로 많다는 것도 미국이 원하는 흐름인 타격전이 되더라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요소로 작용한다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인 메이저리거 야수들이 많았다면 상당수가 불참했을 것이므로)
npb의 야수들이 투수에 비해 평가가 낮지만 war가 슈퍼스타급 이상이면 높은 확률로 메이저리그에서 3.0이상의 war를 찍어주던 전례를 볼때 슈퍼스타급 이상의 npb의 강타자가 즐비한 일본타선은 실질적으로 메이저리그의 호선수급의 타자들을 늘어놓은 강타선이다.

이번 대회에서 메이저리그의 정상급 야수가 상위타선에 즐비하고 아시아 홈런기록을 가지고 있는 야쿠르트의 발렌틴이 4번을 치고 있는 네덜란드 타선에대한 평가가 높은데 일본타선은 이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만일 미국이 스가노공략에 성공해서 타격전으로 미국이 몰고 간다고 해도 미국이 일본에게 낙승하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스마일리가 로테이션대로 일본전에 등판한다면 미국의 승산은 거의 없다. 스마일리는 90마일의 평속이지만 위력있는 포심으로 타자를 잡아내는 투수다. 반면 수준급의 변화구는 없다.
이런 유형의 투수야말로 일본 타자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일본 타자들은 전통적으로 움직이는 무빙패스트볼에 약하지 포심에 약한 것이 아니다.

이번 일본팀 타선의 타자들의 특징은 야마다 테츠토로 대표되듯이 포심에 극강이라는 점이다. 시카고 컵스의 락키가 변칙적인 교활한 기교피칭으로 일본팀과의 연습경기에서 호투했던 점을 미국팀은 의미있게 보아야한다.

범아시아주의의 최종완결자 일본

서구열강이 아시아로 밀려오자 위기감을 느낀 동아시아에서는 소위 범아시아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아시아인이 대동단결하여 서구에 대항하자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대항해 싸워야 하는 서구이지만 서구는 모든 면에서 앞선 선진문물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서구에 대항해 싸우기위해서는 먼저 서구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되는 모순이다.

한중일 모두 서구에 대해서 대항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단 서구를 닮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모순에 봉착해 있었다. 이 때 일본인들은 재빨리 서구인들의 가치관을 파악했다.

서구인들은 세계인을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분류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문명인은 서구문화의 수용자들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야만인으로 이들의 땅을 식민지화하는 것은 오히려 문명인으로서의 도리라고 서구인들은 설파한다. 반면 같은 문명인간은 조약과 국제법에 의한 평등한 관계가 추구된다.

일본인들은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서구화가 불가피하다라고 보았고 그리고 더욱 특히 크게 절감한 것은 식민지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서구인들로부터 문명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서구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범아시아주의에 입각해서 일본에서는 연대하여 서구와 싸워야할 중국과 한국의 쇄신과 근대화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중국의 신해혁명때도 이 때 피를 흘린 일본인도 있을 정도다.

반면 지지부진하기만한 한국과 중국의 쇄신 속도에 초조해진 일본인들 중에는 아예 이들과 거리를 두고 소위 탈아입구를 이루어 서구와 같은 문명국과 같은 지위에 오르는데 집중하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이들도 있었다.

아뭏튼 정리해보면 범아시아주의라는 것은 먼저 서구화를 이루어 힘을 기른 후 서구에 대항하자라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식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공산주의 혁명의 과정과 비슷하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항하고자 하지만 먼저 이전에 철저히 자본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아시아의 범아시아주의도 비슷하다. 서구에 대항해야하지만 먼저 철저히 서구화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근대화에서 세계제2차세계대전의 과정은 딱 바로 그것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먼저 서구화에 성공했고 베르사이유체제를 통해 오대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때만해도 일본은 철저히 서구진영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은 영미와 갈등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걸게 되고 승산이 없음에도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다.

일본은 철저히 서구화의 길을 걸었지만 결국은 영미등 서구열강들에 맞서 아시아주의를 내걸며 제대로 싸운 것도 결국 일본이다.

한마디로 일본은 서구화로 힘을 기른 후 서구와 싸운 것이다. 범아시아주의가 처음 대두되었을 때부터 상정되었던 그 과정을 일본은 그대로 따랐다. 결과적으로...

중국과 한국은 그 첫단계에서 좌절했지만 일본은 아니었다. 서구화에 성공하고 서구에 대항한 것은 오직 일본이었다.

서구인들이 아시아인들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특히 한국인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보지 않았기에 잘 모른다. 일본이 5대열강으로 떠오르고 어느 정도 국제적 지위가 있다라고 그들 자신이 생각했을 때 제출했던 인종차별금지법안도 거부되었던 것이 당시 서구열강이 지배하던 이 세계였다. 미국에서는 흑인의 참정권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일본이 만주사변이후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차저한 것도(물론 서구열강으로부터의 고립) 충분히 문명국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서구인들의 눈에는 그저 경멸하는 유색인종일 뿐이구나하는 배신감때문이었다. 일본은 서구의 기준에 따라 행동해왔다. 문명국 서로는 국제법에 따라 공평하게 일이 처리될 줄 알았을 것이다. 당시 문명국이 야만국에 대해 이권을 가지고 치외법권을 누리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열강 각국은 중국에 대해 서로의 세력범위를 정해두고 있었다. 만주는 일본의 세력범위였다. 이것을 서로 존중해주는 것이 당시 열강들의 체제였던 것이다.

만일 만주를 둘러싼 일이 프랑스의 세력권에서, 혹은 영국의 세력권에서 일어났으면 일본에 향했던 지탄이 일어났을까?

서구열강 자신들은 문명국 야만국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제동을 건 것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의 충실한 서구화의 결과 이제 서구인들들과 동등한 열강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속속 드러났다. 미국의 배일이민법, 리튼보고서, 일본이 제출한 인종차별금지법의 부결등으로 비로소 일본인들은 스스로 우리 역시 서구인들이 멸시하는 유색인종에 불과하구나라는 것으 절감했던 것이다.

정말 이것이 다행이다. 그렇기에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이 주창되었고 비로소 범아시아주의의 최종단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범아시아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고 해서 아시아인들 모두 항복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끝내 독립을 쟁취해냈다.

범아시아주의의 최종단계가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동방생존권과 대동아공영권의 결정적인 차이

일본은 미영과 개전하여 남방으로 진출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전쟁의 목적으로 내걸었다. 반면 같은 주축국이었던 독일은 독소전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동방생존권을 내세웠다.

대동아공영권과 동방생존권... 이 둘은 모두 일본과 독일이 국가생존을 위해 필요로하는 권역으로 설정한 것이지만 그 성격은 명백하게 다르다.

대동아공영권은 어디까지나 공영.. 모두가 번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에 관련된 내용들을 보면 형인 일본이 아우인 아시아의 동생들을 돌보고 이끈다라는 우월적인 태도가 엿보이고 이것이 마치 책봉체제 시절의 중화왕조를 연상기키지만 그래도 일본은 서구열강으로부터 아시아민족들을 해방시키고 그 독립을 보장한다라는 것은 명백히 하였다. 옛 중원의 통일왕조들이 주변 번국들을 정치적으로 종속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처럼...

반면 동방생존권은 철저한 독일민족 이기주위 더 나아가 게르만족 이기주의로 독일은 독소전을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어느 한쪽이 절멸될때까지 싸워야 하는 전쟁으로 보았고 우월한 독일민족은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며 슬라브족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독일민족의 번영을 위한 식민지가 되어야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렇기에 독일은 소련내 점령지에서 가혹한 통치를 펼쳤다. 원래 소련에 반감을 품고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이 우호적이었다면 적극적으로 대소전에서 독일에 협력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독일은 스스로 이러한 가능성을 제로로 반들었다.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소련을 상대로 단기결전을 노리면서 가혹한 점령통치를 펼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소련을 상대로 과거 나폴레옹의 대육균이 실패했던 것처럼 점령지 주민을 적으로 돌리게 되면 점점 길어지는 병참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무리하게 공격하게 되면 패주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반면 일본의 남방작전은 대동아공영권의 구호가 잘 먹혀들면서 오랫동안 서구의 식민지배아래 노예처럼 질곡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아시아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그 결과 적은 수의 병력으로 단기간에 얻고자 했던 전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보편적 가치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역설한 역작이다.

이것은 왜 연합국이 독일의 나치에게 승리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일정부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일본이 말하는 대동아전쟁, 미국이 말하는 태평양전쟁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애초부터 일본의 국력으로는 개전초기 남방작전의 대성공은 있을 수 없었으며 연합국을 상대로 일본이 5년간 싸울 수 있었다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에서 졌지만 독일처럼 중앙정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군사적인 면에서의 일본군의 낙후성은 그동안 수많은 밀리터리 덕후들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졌다. 그런데 필자는 늘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 이러한 일본군이 어떻게 그렇게 단기간에 남방작전을 성공시켰으며 오랜 기간동안 미영과 싸워나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의문의 해답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 있다. 그는 보편적 원리의 힘을 이야기했고 그 힘이 있었기에 연합국은 나치 독일을 무너트릴 수 있었으며 미국은 소련과의 체제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남방작전에서 성공을 거두고 일시적으로 미영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탈제국주의 민족주의라는 보편적인 원리의 힘을 일본이 서구열강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혹자는 일본은 한국과 대만을 식민지배했으며 중국을 침략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은 대체적으로 일본의 통치에 순응적이었다. 일부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내선일체에 동조했으며 국내에서의 항일세력은 자취를 감춘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본의 한국영유가 민족주의에 입각한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라는 인상을 받기 힘들다. 대만의 경우는 지금도 친일적인 국가로 남아있고 중국의 경우도 중국내에서 조차지나 이권을 먼저 반환한 것은 영미가 아니라 일본이다.

단지 일본은 남경정부를 인정했기에 그 조치를 장개석의 정부가 아닌 남경정부를 상대로 했다. 영미가 똑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며 이것은 일본의 조치에 대한 대항적인 성격이었다.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이며 그 실체는 서구열강과 다름없는 식민지확장정책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러한 학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전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독일의 동방생존권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독일인들은 너무 솔직하다. 우직할정도로..

만약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그저 일본이 남방점령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였다고 치자.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은 대의명분을 그렇게 걸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또 그 대의명분에 진심으로 공감한 일본인도 있었다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일본에게 점령당했던 구식민지들을 회복하려는 서구열강과 에에 대항하는 일본이 육성했던 독립파세력들간의 전쟁이 아시아를 휩쓸었다. 바로 일본의 우익들이 후기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이다.

이 전쟁에는 많은 수의 구 일본군출신들이 활약했고 이후 독립을 달성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토오 히로부미와 정도전

일본의 경우 에도막부 시절 유교화가 급속하게 진행됨과 함께 만세일계라고 불리우는 일본천황가의 긴 역사가 일종의 국수적 자긍심의 원천이 되어갔다.
유교화되면 될수록 그 본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 대한 열등감이 커질 수 밖에 없는데 그 본가인 중국에서도 왕조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반면 일본에서는 왕조교체없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일본이야말로 유교에서 말하는 충을 가장 잘 실현한 나라이며 따라서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중화라는 사고에까지 이르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인이 유독 충을 철저히 지켰다기 보다는 권위는 가지고 있으나 실제 권력은 갖지 못했던 일본의 천황의 특수성이 있었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왕조교체없이 왕실이 이어졌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실권이 없기에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질 당위성도 없고 따라서 역성혁명의 당위성조차 찾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어지러워지면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저항적인 민심은 곧바로 왕에 향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천황이 아닌 실제 실권을 쥐고 있었던 막부의 쇼오군에게 향했던 것이다.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신정부가 들어섰을 때 새롭게 태어난 일본의 기틀을 닦았던 이토오 히로부미는 소위 재상중심주의라는 정치사상적 기치를 내걸었다.
이는 중국식 전제왕권을 견제하고 재상이 이끄는 의회를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해가는 시스템인데 본래 도막운동의 기본이념이 막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천황에게 환수시키고 천황이 친정을 펼치는 제국다운 제국을 만드는 것에 있었으므로 이토오 히로부미의 구상은 많은 반감을 샀으나 이때 이런 반대세력을 잠재웠던 논리가 신성한 천황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즉, 천황이 현실정치의 전권을 쥐게 되면 당연히 실정의 경우 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논리였다.

그렇게해서 천황에게 절대권력이 집중되는 중국식의 전제군주형 정치시스템이 채택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나 이토오 히로부미가 원했던 재상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재상중심주의는 결국 실현될 수 없었다.
천황의 지위는 어찌보면 에도막부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권위만 가질뿐 권력행사는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실권이 없다라기 보다는 정치에 대해 책임을 지지않는다라는 측면이 더 강했고 재상의 경우 그 권력과 권위는 에도막부시절의 쇼오군에 비해서 훨씬 약했다. 재상이 마치 에도시절의 쇼오군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가경영의 큰 공백이 초래되었다. 천황은 책임을 지지 않으며 실제로 나라를 이끌어가야 하는 재상에게는 그다지 큰 힘이 없다보니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불만과 주장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혼란을 빚다가 결국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펴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토오 히로부미의 실패를 보면서 나는 조선의 실질적인 건설자로 불리우는 정도전이란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정도전도 왕권을 제한하고 사대부의 대표인 재상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펼치는 시스템을 구상했다.
세습제인 왕조제에서는 암군이 등장하면 나라가 결단나게 되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정도전은 사대부중에서 가장 현명한 인물이 실권을 쥐고 정치를 행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점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전의 시도는 왕권에 대한 위협과 도전으로 여겨져 결국 이방원에 의해 좌절되고 마는데 일본의 경우를 참고하여 생각해보면 정도전이야말로 오랫동안 조선왕조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 노력했던 진정한 충신이 아닐까?
앞서이야기한대로 중국이나 한국에서 역성혁명이 발생했던 것은 황제나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시스템이었기에 실정이 있었을 경우 그 책임도 따르게 된다. 그것이 역성혁명의 근거다.
만일 정도전이 기획했던 것처럼 조선의 정치시스템이 흘러갔다면 조선의 왕은 실권은 가질 수 없을지 모르나 권위는 가지고 있으며 책임 또한 지지 않으므로 일본의 천황가처럼 역성혁명의 위험없이 오랬동안 존속할 수 있는 닫위성을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는 조선의 왕가입장에서는 큰 메리트다.
또 정도전의 의도대로 암군의 출현과는 상관없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능력있는 이에 의해 통치되는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왕가나 나라 모두에게 선이 되는 구조다.

이토오 히로부미가 일본의 정치시스템을 두고 고민끝에 헌법을 만들어낸 것이 1889년의 일이다. 그런데 그와 거의 유사한 고민속에서 시스템 구축을 시험했던 정도전은 그일을 14세기에 해내려고 하였다. 무려 500여년이 앞선일이다.
출발점에 섰던 조선이 얼마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국가였는지.. 그리고 그것을 설계한 정도전이란 인물이 얼마나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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