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란 드라마가 생각하게 해준 조선망국의 원인

얼마전에 끝난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의 세종은 일종의 반체제 비밀조직인 밀본을 붕당으로써 인정하겠노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붕당... 이 붕당이야말로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것임은 물론이다.
일본통치시대때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이 붕당의 폐혜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아마 그들은 그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여 일본에 병합된 나라였고 반드시 그런 실패의 역사의 원인이 조선사내에서 있을 것이라보고 그것을 찾아냈을 것이기때문이다.

그러나 붕당자체는 송나라 이후 성리학의 이념하에서 매우 긍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군자끼리 모여 만들어진 군자당이 소인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큰 지지를 받았다.
조선이 이런 붕당정치를 매우 적극적으로 행했던 것은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하여 건국되었던 것이 조선이고 보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진정 조선이 훗날 서세동점의 역사적 변환기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도태되었던 가장 큰 원인은 붕당정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70여년에 걸친 노론에 의한 일당독재체제가 확립되면서 부터였다.
그 이전까진 복수의 붕당이 서로를 견제하는 구도속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붕당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노론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고 난후 조선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이 노론의 독재시기를 거쳐 세도정치로 이행되면서 조선은 완전히 결딴이 나게 된다.
견제와 균형이 사라지자 생겨난 비극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했던 조선은 군자인 사대부들에 의해 정치가 행해지는 것을 기본으로 했으므로 만일 위정자들이 진정한 군자였다면 붕당간의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말기에 보이는 민심이반과 민생파탄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군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기위해 그토록 열심히 유교경전을 공부하며 군자가 되기위해 노력했을 조선의 사대부들이 성리학의 이상대로 나라를 이끌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기도 한 먹고사는 문제때문이었다.
과거제도가 관리등용의 핵심이었던 조선사회에서 양반계층이 자신의 가문의 명예와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합격이 가장 큰 눈앞에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과거를 통해 관리로 임용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치열한 경쟁구도였다.
따라서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된 자는 자신의 가문을 위해 또 친족들을 위해 자신이 권력을 잡았을 때 확실한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되는 압력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밥그릇 싸움때문에 그들은 성리학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고 군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뿐만아니라 똑같이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있던 중국왕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유교문명권에서 유일하게 과거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던 나라가 있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당을 모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견지하는 율령국가를 지향했지만 바로 좌절에 부딪혀 19세기까지 무인정권이 실질적으로 나라를 지배하는 수많은 번으로 나누어진 봉건체제로 시종했다. 일본의 정치체제는 사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그 발전단계가 매우 미약한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지 못한 나라였다.
그럼에도 그런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여 근대국가로 발돋음했다.
여기에는 역설적으로 정치적 발전단계가 낙후하여 과거제도를 제대로 도입하지 못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 조정의 관리임용은 전문분야별로 세습이 허용된 가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어느 특정가문에 태어난 이는 자신의 선조들로부터 대를 이어 내려온 가업에 해당하는 특정분야의 일밖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승진도 그에 따라 제한되어 있었다. 반면 그 일은 자신이 가문에 의해서만 세습되어 맡겨지는 일이므로 안정적이었고 전문성이 인정되는 것이었다.

제도적으로는 양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조선사회에 비해 일본은 확실히 폐쇄적이고 고정화된 신분사회였다.마치 신라시대의 골품제도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한가지 메리트는 있었다. 밥그릇 싸움때문에 일단 우선 내가 살기위해 자신의 철학 자신의 가치를 버려야만하는 압력에는 덜 노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유식자들은 입신먕명에 대해서는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명확했지만 독점성과 전문성은 있었으므로 자신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불확실성은 없었기때문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에 비하면 보다 자유롭게 순수한 학문적 견지에서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보다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하고 사회개혁에 대한 대안을 내놓았던 실학자들은 대개가 중앙정권에서 소외된 이들이었다.
이들은 어차피 입신양명은 힘들었으니 자신의 학문적 양심에 따라 연구를 하고 대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반면 입신양명하여 그 권력의 신장을 통해 얻을 것이 많았던 이들은 그 권력자체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래서 변화를 거부했다.
유교의 흐름을 보면 성리학 이후 양명학이 새롭게 태두했고 이것은 특히 일본에서 융성하여 다시 중국으로 역수출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선은 철저한 성리학 국가였지만 신유학이라고 불리는 양명학의 확산은 동양3국중에서 가장 뒤떨어져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유학에서 말한는 군자가 되는 길의 가장 큰 첩경은 일단 먹고사는 문제 자신의 사리사욕을 초월하여 정말 도덕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중요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제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준다라는 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요소였으나 그 치열한 경쟁은 결국 조선의 유생들을 진정한 군자의 길로 이끄는데 실패하게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자연계의 만고불변의 법칙인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벗아나 생각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되는 인간성은 적자생존이라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라는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치열한 경쟁과 그것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시되는 현대의 한국사회..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고귀한 철학, 양심, 역사발전에 대한 거시적 안목하에서의 사회개조에 대한 논의를 해나갈 수 있는 지적호기심이 발생할 수 있을까?

선진적인 조선의 과거제도.. 반면 그런 과거제도가 없었던 일본의 역사전개를 보면서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덧글

  • 보더 2012/01/04 23:53 # 답글

    다 좋은데 밸리가..
    게다가 인기글이시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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